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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동사니 역사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

by 서래후작 2023. 1. 10.

우주에 존재하는 악과 이를 방관하는 듯한 하나님은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사이의 논쟁 주제이다. 전자는 예기치 못하고 부당해 보이는 인생의 고난에 직면했을 때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후자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한 자신들의 무신론적 '복음'으로써 악을 허용하고 방관하는 신은 무기력한 신이며 전지전능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결국 기독교가 주장하는 신은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나 또한 인생의 시련을 여러차례 겪으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던 적이 많다. 모태신앙은 어지간해선 '신이 없다'까지는 가지 않는다.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의지가 어떤 관성처럼 유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장기간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지키지 못하거나, 세상 풍조에 휩쓸려 비기독교인과 별반 차이가 없어지거나, 혹은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가 의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고난이 연이어 발생하면 그러한 관성도 점차 약해지기 마련이다.

 

 

기독교인이 고난을 겪으면 처음 보이는 반응은 대개 '회개'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들은 일차적으로 자신이 겪는 고난의 원인을 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개 재난이 닥치는 이유는 두 종류인데, 인과관계가 명확한, 그러니까 성경이 제시하는 올바르지 않은 행위로 말미암는 경우도 물론 있다. 그러나 맥락이 전혀 없는 재앙도 있기 마련이다. '회개'의 반응이 일어난 사람에게 인과관계가 존재하는 재난은 문제를 시정하고 돌이킬 여지가 있다. 그러나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환난을 당한 사람은 상황이 해석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에 즉각적으로 보복을 하시는 분도 아닐뿐더러, 혹여 그럴 의사가 있으시다고 하더라도 모든 고난을 자신의 죄에 원인을 두는 것은 하나님을 오해하는 해석이라는 주장도 있다)

 

 

맥락이 이해가 가지 않는 고난들은 말 그대로 뺑소니를 당하듯 갑작스레 일어난 재난이다. 가령, 전쟁이 일어났는데 어떤 여인이 군인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하자. 그 여인의 죄로 말미암아 성폭행을 당했다고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회개'의 반응을 우선적으로 지나간, 혹은 '회개'의 필요성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 피해자는 고난에 대해 곧바로 '분노'의 반응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분노의 대상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다. 

 

 

이 책은 우주에 존재하는 악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고난에 대해 다룬다. 

 

 

고난을 해석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소개한다. 그리스의 스토아 철학 등 비기독교적 학문을 비롯해 기독교적 해석을 아우른다. 

 

 

인간의 타락에 따른 죄의 삯이 우주로 들어오게 된 배경과,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맞게 자유의지가 각 개인에게 널리 퍼진 환경적 요인들, 그리고 결국엔 최후의 심판과 완전한 육의 회복까지, 우주사의 처음과 끝에 대한 이해가 고난을 해석하기 위한 대전제가 된다. 

 

 

욥의 경우처럼 의인도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난을 겪을 수 있으며, 이를 인간적 지혜로 해석하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욥기 마지막을 보더라도 하나님이 등장하셔서 고난 받는 욥을 위로하지 않으시고, 욥의 인간적 이해가 얼마나 한계가 있는지를 꾸짖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결국엔 모든 것이 회복될 것이며, 잃어버린 시간과 노화돼 진흙으로 돌아가버릴 육체마저 최상의 상태로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이 고난받는 이에게 줄 수 있는 기독교 진리의 최대 위로이다. 

 

 

사실 고난 받는 사람에겐 어떤 신학적 해석이나 권면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극단적인 악을 만나 환난 당하는 이에게 최후의 심판이나 소망 따위가 당장 귀에 들어 오겠는가? 카슈미르 분쟁 당시 인도와 파키스탄군은 양측의 민간인을 잔인하게 고문하고 학살했다. 젖먹이의 팔과 다리를 잡아 찢어서 죽이는, 입에 담기조차 힘든 일들이 일어났다. 코소보 내전은 어떤가? 세르비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인들은 서로를 미친듯이 고문하고 죽였다. 대규모 인종청소가 자행됐다. 갓난 아기의 한쪽 팔을 잡고 나무에 메어쳐 죽였다.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윤간하기도 했다. 

 

 

과연 여기 어디에 하나님의 우주적 섭리가 있으며,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경륜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저자도 하나님이 악을 허용하신 이유를 완전히 납득시켜 주는 신정론은 없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문을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분노에 타올라 신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만약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인간은 악이나 재난에 대해 분노를 일으킬 이유조차 없다. 즉 어차피 모든 것은 우연에 의해 일어난, 우주적인 뺑소니 사고에 불과하기 때문에 분노의 대상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에너지 낭비인 셈이다. 하나님이 됐든 사탄이 됐든 인간은 자신이 당한 부당함에 대한 해석과 위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허무하다. 인생의 시간은 쏜 살같이 흘러간다. 자신의 존재 의미를 어떤 사람은 학문의 금자탑으로, 명예욕으로, 재물로 드러내려고 한다. 본질적으로 모두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은 극단적 쾌락주의로 내달린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음란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기왕 떠나기로 작정했다면 어설프게 떠나는 것이 더 큰 번민을 가져다 준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거기서도 행복을 찾지 못한다. 결국 자신의 방탕한 삶으로 인해 이제는 인과관계가 명확한 '재앙'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다. 허비된 인생, 물질, 사랑, 관계가 그것이다. 결국은 못 버티고 하나님이 주셨던 평안함을 기억하며 관성에 이끌려 되돌아 온다. 

 

 

물론 그 과정에서도 명확하게 왜 앞서 있었던 고난이 있었는지를 해석하지 못할 수 있다. 혹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어떤 고난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그림의 한 장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든 그 모든 그림을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볼 수 없고,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면, 왜 그 고난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는지는 천국에 가 봐야만 답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책은 고난에 대해 깊이 다루고 있다. 책의 내용이 모두를 만족시킬 순 없을 것이다. 고난과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은 분노를 억누르며 읽어 나가야 할 지도 모른다. 욥기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싶다. 유대인들은 수천년전에 이미 선과 악, 의인이 받는 부당한 고난에 대해 치열한 고찰을 했다. 답은 각자가 찾아야 한다. 당장에 답을 찾을 수 없다면, 일단은 그 터널을 힘들여 해석하지 말고 통과해 나가는 것이 순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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